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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damental: 이상을 향한 방황과 좌절

지구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이유가 되는, 어디에나 적용되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추구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게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수학이야 말로 모든 학문의 왕이자 인류 지성의 정수(精髓)라 여겼고 수학에서 멀어질수록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물체의 모든 움직임을 수학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 기본적인 힘과 입자로 삼라만상을 해석하는 입자물리학을 알게되었고 물리학에 시나브로 매료되었습니다.

온갖 공식과 기호, 깔끔한 증명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결정타는 이휘소 박사 다튜멘터리였습니다. 다튜에 출연해 칠판에 분필로 수식을 써내려 가는, 백발 노교수의 모습에 홀라당 반해버렸습니다. 그분은 입자물리학에서 일가를 이루신 김진의 교수님이었습니다. 당시 김 교수님은 GIST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자연스레 그 대학에 입학해 멋진 물리학도로 성장하겠다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고2 겨울 방학. 급한 대로 고교 물리를 마스터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수학 기본기가 있었기에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물리Ⅱ를 독학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대학 1학년, 수학과 물리학 수업이 퍽 즐거웠습니다. 성적도 곧잘 나왔고 교수님들의 기대도 받았습니다. 특히나 수학 성적이 좋아서 1학년 필수교양이었던 미적분학, 다변수해석학 TA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2학년 1학기에 들었던 ‘한국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한 학기 동안 성리학에 홀렸고 한문 공부에 탐닉하였습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에 공통된 원리가 관통하고 있다는 언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한자를 외고 한문으로 적힌 문장의 뜻을 풀어내는 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태초의 비밀을 저 스스로 깨우친 양 경이로워 했으며 광활한 대지 앞에 선 연암처럼 매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리학 특히 조선시대 유학(儒學) 담론은 제 모든 주의와 관심을 독차지했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았습니다. 개학을 코앞에 둔 초등학생마냥 허겁지겁 닥친 일을 해치웠습니다.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현역병으로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학과 공부를 등한시하고 한국사, 성리학, 한문에 빠져 살았습니다. 4학년이 되자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검증해보이고 싶었습니다. 기왕이면 최고를 목표로 삼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습니다.

일이 술술 풀리는 듯했습니다. 재능이 충분하다 믿었고 순탄히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리라 확신했습니다. 허나 석사과정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읽어야 할 선행연구가 너무 많았고 학계의 컨벤션에도 익숙지 않았습니다. 칭찬보다는 꾸중을 받는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혹독한 비평을 받기 시작하자 저는 급격히 위축되었습니다.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에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들여 여러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했습니다. 학습 시간은 점차 줄었고 흥미와 열정, 의지는 산새처럼 흩어졌습니다. 석사 2년차가 되던 2019년,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 전업 연구원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결국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생업과 실업의 길로 나섰습니다.

이전까지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봉급을 받는 삶에 대한 일말의 여지도 두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정보도 개념도 명확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멋도 모르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원서를 넣었으나 번번이 서류전형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물리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중소기업’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날마다 사OO 사이트를 전전하던 중 경기도에 위치한 기업에서 면접 기회를 얻었고 합격했습니다.

첫 회사는 오퍼상 + 기술영업 하는 회사였습니다. 해외 유명 제조사에서 제품을 수입한 후 국내 구매자에게 인도, 설치하고 운용 교육 및 유지보수를 담당했습니다. 틈틈이 영업도 다녔구요. 사장님, 상사, 동료 모두 너무나도 좋은 분들이었지만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물리학을 손에서 놓은 지 6년 가량된 제가 전공과 관련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웠습니다. 잦은 회식과 그로 인한 음주, 끝없는 지방 출장은 제 몸을 괴롭혔습니다.

퇴근 시간, 영세 업체들이 모인 공단에서 물밀듯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과 매일 저녁을 술로 달래며 온갖 추태를 서슴지 않는 공단 근처 주택가 거주민들을 보며 엄청난 자괴감과 환멸에 몸부림쳤습니다. 돌파구를 찾고 사회가 원하는 실력을 갖추기는커녕 ‘나는 저들과 달라.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는 오만한 생각에 여념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곳을 탈출하는 데 골몰하다 서울에 있는 대학 수학 전문 출판사에 편집자 자리를 제안 받았습니다. 연봉은 무려 20%나 낮았지만 벗어난다는 기쁨에 앞뒤 재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주된 업무는 대학 수학 교과서 원고를 편집해 서적으로 출판하는 일이었습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다보니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수식과 도형, 그래프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했기에 원고는 LaTeX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되었습니다. 문법에 따라 원고를 편집하고 저자가 입력하기 어려운,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를 프로그래밍으로 구현했습니다. 비록 마이너한 언어였지만, 코딩을 하고 코드를 컴파일하여 결과물을 출력하며 최종적으로는 책 한 권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끝을 맺는다’는 성취감을 맛보았습니다. 프로그래밍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도 극복했습니다. 이참에 범용성, 확장성이 있고 트렌디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보리라 다짐했습니다.

이런 저를 오래전부터 봐왔고 지금은 현업에서 NLP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는 대학 동기가 인공지능 공부를 권했습니다. 요즘 핫한 분야일 뿐만 아니라 머신러닝의 기저는 수학과 통계학인데 저는 그 기초가 탄탄하니 남들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오랜 방황을 끝내야 했습니다. 지금껏 배워온 것을 십분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제 성향과 맞아 정 붙이고 진득하게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습니다.

현 상황과 심정, 목표를 진솔하게 털어놓았고 부모님과 연인 모두 격려, 응원해주었습니다. 동기 역시 물심양면으로 저를 도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2020 AI College의 온·오프라인 교육 및 팀 프로젝트 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교육 과정에서의 성취와 제 경험, 역량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취업문을 두드렸고 인공지능 스타트업에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채용되었습니다.

10개월이라는 짧은 경력에도 10여 개의 모델링 프로젝트를 완수하며 여러 산업 현장에서 축적된 양질의 데이터를 다루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이론 지식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고 데이터분석 준전문가(ADsP)와 빅데이터 분석기사를 취득했습니다. 펀더멘탈이 탄탄해 머신러닝 이론, 결과 해석 및 시각화에 해박면서도 비즈니스 감각을 겸비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우뚝 서기 위해 목하 주경야독 중입니다.

20대를 돌아보면 근본을 궁구하는 학문에 기웃겨렸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습니다. 무수히 좌절했으며 힘들게 내린 결단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고비마다 무사히 커리어를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초가 튼튼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어떤 일이든 핵심을 파악하고 난 후에야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뼈저리게 깨우쳤습니다. 어렵게 터특한 깨달음을 자양분 삼아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날을 꿉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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